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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끄적여온 글들 (긴 것)  




[ 연애소설 '4 o'clock' - 소개글 ]

열 편짜리 연애소설인 '4 o'clock'을 간격을 두고 차례로 올려봅니다.

평소 쓰던 것과는 다른 종류의, 짧고 단순하며 유치한 대신, '척'하지 않고 그만큼 제 자신에게 솔직한 픽션이 저에게 필요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뿐. (그 뿐이라고 하기에는 좀 거창한 것 같기도 하지만.) 어쩌면 그런 이유로, 이 소설이 제 지난 연애(들)의 결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듭니다.

평소에도 연애 얘기가 많았습니다만, 연애소설이라는 이름을, 내 얼마나 붙이고 싶었던지.

가볍게 읽어주세요, 가볍게 쓴 글이니. - 제 지난 연애 결론(들)의 일부일 뿐이라고요. (아유, 부끄러워라.)

하지만, 묻고 싶습니다.

연애라는 것, 어떤... 것인가요. 사랑에 대한 답까지야 바라지도 않습니다만.

......

제목은 각각 다음에서 따왔습니다.

(1) Early AM Attitude : Dave Grusin과 Lee Ritenour의 곡.

(2) Distance : Utada Hikaru의 곡.



[ 연애소설 '4 o'clock' - (1) Early AM Attitude ]

신혼살림을 차리며 나간 룸메이트 진태가 남겨준 쓰레기만 해도 웬만한 살림 하나 정도는 꾸릴 수 있을 정도였다. 형민과 함께이기 이전부터 각자의 세간이 있던 데다가, 둘 다 일단 한번 들여놓은 살림살이를 버릴 수 있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런 연유로 그대로 쌓여오기만 했던 짐들이었다. 쓰지 않는 냄비 식기만 해도 식당 하나는 너끈히 차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이 짐들 태반이 버려질 혹은 단순히 새로 정리할 목적으로 볕 좋은 봄날 아침부터 빌라 밖에 하나 둘 씩 층을 쌓아가고 있었다.

진태는 형민과 대학 동기이자 은행 입사 동기이기도 했다. 학교 다니면서 붙어 다녔다거나 같은 지점에서 근무했던 적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대학 동창이 입사 동기가 되었다는 이유로 그들은 단순하게 의기투합할 수 있었다. 근무지는 진태 쪽이 좀 더 멀었지만 형민이 집값의 많은 부분을 낸다는 조건으로 적당한 곳에 꽤나 널찍한 빌라 하나를 전세 낸 것이 그 동거관계의 시작이었다. 그런 진태가 형민과의 1년 조금 넘는 동거생활을 끝마치고 결혼을 해버린 것이었다.

형민은 혼자서 낑낑대며 쓰레기 스티커를 붙인 낡은 책상을 밖으로 끌어내리던 중이었다. 아직은 싸늘한 봄날 아침 기운에도 형민의 얼굴은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음식물 쓰레기를 뒤지던 동네 길고양이들도 헌 책상 옮기는 소리에 깜짝 놀라 주차된 자동차 밑으로 숨어 들어갔다.

"아직도 안 끝났나보네요."

아래층 사는 여자였다. 형민과는 일 년이 넘도록 마주쳐와서 이제는 농담도 제법 주고받는 대학원생이었다. 영문학인가 일문학을 공부한다고 했다.

"어, 은주씨. 안녕하세요? 죄송해요. 아침부터 시끄럽죠? 어제오늘 이사가 좀 있어서요. 아, 알고 계셨나?"

은주는 편의점에라도 잠깐 다녀오는지 빨간 지갑과 편의점 비닐 봉지를 양손에 하나씩 들고 있었다. 흰 세로줄무늬가 있는 빨간색 운동복에 흰 운동화 차림이었다.

"룸메이트란 녀석이 좋다고 휙 하니 신혼여행을 가버려서, 집 정돈 좀 하느라고 혼자 주말을 통째로 다 버렸네요. 녀석이 도와준다고는 했는데, 둘이 시간 맞추기도 힘들 것 같아 혼자 하고 있는 중이에요."

형민은 옷소매로 얼굴에 맺힌 땀을 닦고 나서 먼지로 지저분해진 손을 웃옷에다 탁탁 털어냈다. 콧잔등 끝까지 내려온 안경을 슬쩍 올리고는 필요 이상의 설명까지 해가며 헤헤 웃어댔다.

은주는 헌 책상을 한번 살펴보더니 잘 붙지 않은 쓰레기 수거 딱지를 검지로 밀어서 제대로 붙힌 후, 아직 트이지 않은 아침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스스로도 자기 목소리에 깜짝 놀랐는지 잠시 기침을 늘어놓았다.

"제가 뭐 도와드릴 거 없어요? 저, 보기보다 힘도 좋은데."

그러면서 알통을 보이려는 자세로 팔뚝을 들어 보이는 은주였다.

"아니에요, 시끄러운 것만 해도 죄송한 걸요. 쌀쌀한데 그만 들어가 보세요."

형민은 책상을 거의 끌다시피 골목가로 옮겨놓고서는 주차된 차들이 차를 뺄 수 있는 거리를 살폈다. 땀 때문에 내려온 안경을, 다시 한번 올렸다. 크게 숨을 내쉬다가 은주가 여태 들어가지 않고 빌라 입구에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

"어라, 진짜 도와주려던 거였어요?"

형민은 장난스레 웃으며 한 마디를 더 던졌다.

"저한테 호의 보여주시면 안 돼요. 외로운 아저씨라 깜빡 넘어가 버릴 테니까."

눈도 못 마주치고 어색하게 하는 농담을, 은주는 웃으며 가볍게 맞받았다.

"이 아저씨 농담도. 여자 친구 있는 거 다 아는 걸요. 외롭다니, 그분 마음 참 아프시겠네."

그러면서 은주는 비닐 봉지에서 스포츠 음료 한 캔을 꺼냈다. 얼굴까지 찌푸리며 몇 번씩이나 뚜껑을 따려다가 포기하고는 그냥 형민에게 건넸다. 냉장고 기운이 남아서 아직 물방울이 방울방울 맺혀있는 녀석이었다.

"사실은 이거라도 건네려고 기다렸어요. 다 끝난 거예요?"

형민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공손히 캔을 받아 빌라 입구 턱에 앉았다. 두 모금 정도 크게 들이마셨다. 목까지 땀방울이 흐르고 있었다. 은주도 바닥에 비닐 봉지를 내려놓고는 가만히 형민 옆에 앉았다. 지갑을 봉지 안에 넣고 나서 발을 가지런히 모아 두어 번 정도 다리를 쭉 폈다. 지켜보던 형민이 피식 웃는 것을 보고는 민망해져서 한 마디 했다.

"아, 이거요? 음, 아침 운동."

그 소리에 형민이 소리 없이 다시 웃었다.

"이사 뒷정리, 대충 다 끝났어요. 내다버릴 거 다 내다버렸죠. 원래는 책상부터 내놨어야 했는데, 바보같이 갖고 있으려다가."

형민은 남은 음료수를 벌컥벌컥 마셔댔다. 빤히 바라보고 있는 은주를 보고는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은주가 피식 웃어댔다.

"혼자 사시는 거 이제 시작이겠네. 걱정되시겠다."

은주는 손을 뻗어 형민의 다 마신 음료수 캔을 억지로 빼앗아왔다. 조심스레 비닐 안에 넣었다. 그 사이 형민은 기지개를 펴듯 두 손을 위로 앞으로 쭉쭉 뻗어대고 있었다.

"네, 이제 시작. 그러니까, 가끔 맛난 요리 남으면 갖다주고 좀 그래주세요."

그러자 은주는 길 반대편의 버려진 책상을 보며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설마, 제 손에서 맛난 게 나올 리가. 그런 거 생기면 남지 않아도 자랑하러 갖다 드릴 테니 부탁 같은 거 안 하셔도 될 듯 해요."

봄바람이 살짝 불어왔다. 형민은 '황사, 황사'를 중얼거리며 벌떡 일어났다가 여태 앉아있는 은주를 보고는 이내 다시 앉아 버렸다. 이번에는 은주가 형민 식으로 기지개를 폈다.

저쪽 차 밑에 숨어있던 길고양이들이 슬금슬금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큰 녀석이 하나, 아기 고양이가 둘이었다. 어느 골목의 봄날 아침 풍경이 그랬다.

(2005년, Written by bluemoon.)



[ 연애소설 '4 o'clock' - (2) Distance ]

"미안해, 하지만 말야......"

동현은 꽃다발을 손에 든 채 은주의 말만 기다렸다. 평소에는 누구에게나 시선을 마주치며 대화하는 은주였지만, 기분이 안 좋을 때에는 절대로 눈을 바라보지 않았다.

"하지만 뭐? 어쩔 수 없었다고?"

은주는 눈을 가늘게 뜨고 신경질적으로 말을 했다. 베란다 창이 주먹 하나만큼 열려있었다.

"칫. 매번 그렇지 뭐."

"그래서, 늦게라도 이렇게 달려왔잖아. 회사에서 갑자기 일이 생겼단 말야.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잖아."

"칫. 맘에 안 들어, 맘에 안 들어, 맘에 안 들어."

은주는 십 분이 넘도록 동현을 현관 입구에 세워놓은 채였다. 대화가 시작부터 날카로웠으니, 따지고 보면 동현이 아직 들어가지 못한 것도 은주가 강요한 것은 아니었다.

"알았어. 앞으로는 사무실 일이 늦어져도 네가 오빠를 필요로 하면 꼭......"

"됐어. 오지도 못할 거면서."

은주는 꽃다발이 거슬리는 눈치였다. 적당한 수의 장미. 언제나 그래왔듯이 이번에도 장미 꽃다발.

"은주야."

이제 짜증이 났다는 표시였다. 동현이 은주의 이름만을 짧게 부르고 말을 그친다는 것은 짜증이 났다는 숨겨진 표현이었다.

은주는 동현을 현관 입구에 세워둔 채, 혼자서만 그냥 돌아서 베란다 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가만히 서서 자정이 다 되어 가는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언뜻 보면 맑아 보이는 하늘인데도 별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오빠, 오늘은 이만 하자. 나, 오빠 짜증내는 거 보기 싫어."

동현은 조심스레 꽃다발을 바닥에 내려놓고서 안으로 들어왔다. 창가에 선 은주를 조용히 뒤에서 껴안았다. 은주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동현이 눈물을 닦아주려고 했지만, 은주의 손은 이를 가로막았다. 더 많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창문 틈으로 밤바람이 들어왔다.

"미안해, 정말. 울지 마. 미안해. 미안해."

흐르는 대로 그냥 둔 눈물이 볼을 타고 내려와 턱 아래로 뚝뚝 떨어졌다. 은주는 이 눈물을 닦지도 않고 말했다.

"오빠 때문에 우는 거 아냐. 아니란 말야. 그러니까, 그냥, 그냥 내버려둬."

동현은 은주를 안은 그 자세 그대로 한참을 더 서 있었다. 안은 손등에 떨어지는 은주의 눈물이 밤 공기에 더 차가워졌다.

잠시 후, 은주가 몸을 몇 번 떨더니 동현의 손을 풀고 말했다. 아직 등은 돌린 채였다. 당연히 눈을 마주치지도 않았다.

"저녁 못 먹었다고 했지. 늦었지만 뭐라도 간단하게 먹고 가. 피곤할 텐데 월요일부터 나 때문에 힘 빼지 말고."

*

좁다란 베란다 위아래 층에 남녀가 나란히 서 있었다. 남자가 위, 여자가 아래였다. 남자는 훨씬 전부터 그 곳에 서 있었다. 귀에 이어폰을 끼고 있었다.

은주는 달그락 소리에 위를 한번 쳐다보더니 흰색 지퍼 카디건을 잘 추스르며 몇 번이고 크게 헛기침을 해댔다. 뒤늦게 아래층의 인기척을 느낀 형민이 깜짝 놀라며 위태위태할 정도로 몸을 숙여 밑을 내려다보았다. 마침내 눈이 마주친 은주가 무표정한 얼굴로 간단하게 눈인사를 건넸다. 눈이 퉁퉁 부어있었지만 밤이 깊어서 잘 보이지는 않았다.

"위층 아저씨, 심심하신가 봐요. 그냥 잠이 안 오시는 건가?"

"아래층이 좀 시끄러워서 잘 몰랐는데. 내가 심심했나?"

"미안해요. 다 들렸나보네. 큰 소리 낸 것 같지는 않은데."

은주는 낮은 난간에 기대어 눈앞에 있는 나무 줄기 하나를 봤다. 울타리 대신 건물과 주차 공간 사이에 나무 하나 폭으로 작은 정원 비슷하게 만들어놓은 것이라는데, 관리가 없어서 나무가 온통 상처투성이였다.

"아니에요. 이어폰도 꼈겠다, 어차피 간간이 웅성거리는 정도 밖에 안 들렸으니까. 잠자는 거야, 흠, 맞아, 나, 자야 하는구나. 깜빡했네, 내일 출근도 해야 하는데."

형민은 자신이 생각해 봐도 멋쩍다는 듯, 대화하느라 귀에서 빼내어 목에 둘러놓은 이어폰 줄을 내려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은주가 보고 있는 나무 줄기의 위 부분을 똑같이 살펴봤다.

"다투고 있는 것 같긴 하던데. 아참, 이 정도까지는 실례인가."

잠시 조용해졌다. 바람 소리도 차 소리도 멎었다. 은주는 손을 뻗어 나무 줄기를 만지려 했으나 손가락 마디 하나 정도만큼 더 멀어 닿지가 않았다. 얼굴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그렇지만, 그래서 어떻게 해 달라는 게 아니었는데. 누가 회사 일 이해 못 할까봐? 그냥, 그냥 화낸 것뿐인데. 꼭 오빠한테 화낸 건 아니었는데."

은주가 잠깐 동안의 정적을 깨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저 멀리서 자동차 경적 소리가 들려왔다. 이내 은주는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아, 취직하고 싶네. 대학원 같은 데는 왜 들어갔을까."

위층 아저씨는 은주의 반 혼잣말에 살짝 미소만 지었다. 물론 아래층 아가씨는 이를 볼 수 없었다. 아직은 쌀쌀한 밤바람만이 봄날 기운을 남기며 사라져갔다.

(2005년, Written by bluem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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